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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은 멜로, 미스터리, 누아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작품이다. 박해일과 탕웨이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사랑의 본질, 탐닉, 도덕성과 죄책감, 그리고 헤어짐이라는 감정의 미학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 글에서는 ‘헤어질 결심’의 스토리 전개를 중심으로 주인공들의 심리,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통해 인간 내면의 이중성과 선택의 무게를 깊이 있게 분석한다.
추적과 사랑의 경계
영화는 한 남자의 추락사 사건으로 시작된다. 형사 ‘해준’(박해일)은 산에서 추락한 남성의 사건을 맡으며, 그의 중국인 아내 ‘서래’(탕웨이)를 조사하게 된다. 처음에는 단순한 참고인으로 여겨졌던 서래는 시간이 흐를수록 의문과 매혹의 대상이 되어간다. 해준은 철저하고 도덕적인 형사지만, 수사 중 서래의 말투, 표정, 감정에 점점 빠져든다. 그는 서래가 범인일 수도 있다는 의심과, 그녀를 향한 연민과 감정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해준은 흔들리는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 용의자를 사랑하게 되는 형사,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서래는 애도의 감정도, 충격도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침착하고, 오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 안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해준은 알 수 없지만, 그 미지성이 해준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영화는 수사라는 틀을 빌리지만, 실상은 감정의 추적극이다. 해준이 서래를 감시하며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고, 서래 역시 해준에게 의도적인 접근과 호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관계는 명확한 사랑도, 명백한 신뢰도 아닌 모호한 매혹이다. 바로 이 ‘결심하지 못한 사랑’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해준: 깊어지는 의심, 깊어지는 관심
해준은 깔끔한 습관과 명확한 도덕 기준을 가진 형사다. 그러나 서래를 만난 순간부터 해준은 자신이 쌓아온 질서와 규칙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서래를 지켜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사적인 감정’을 갖기 시작하고, 그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면서 점차 균열이 생긴다. 서래를 관찰하며 그는 말한다. " 그녀는 의심스러웠고, 그래서 지켜보았고, 그래서 잠 못 들었다.
그의 내면에는 형사로서의 윤리, 남편으로서의 책임, 그리고 한 여성에 대한 집착적 연모가 동시에 자리 잡고 충돌한다. 결국 해준은 수사에서 손을 떼고, 서래와의 관계를 잠시 열어보지만, 그 감정은 ‘결심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서래에게 말한다. " 나는 당신을 사랑했는지, 수사했던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는 끝내 서래를 온전히 사랑하거나, 끝내 의심하거나, 그 어느 것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이 결심의 실패는 그가 죄책감과 미련 사이에서 영원히 떠돌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서래: 사랑 혹은 위장, 감정의 두얼굴
서래는 전형적인 ‘팜므파탈’ 캐릭터처럼 등장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 연인인 동시에 도망자로 드러난다. 그녀는 해준이 자신에게 의심과 애정을 동시에 가진다는 걸 알면서도, 그 틈을 비집고 감정을 스며들게 한다.
서래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해준을 향해 이런 말을 남긴다. " 형사님이 나를 의심하지 않으면 좋겠고, 민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녀의 모든 언행은 진심일 수도, 계산일 수도 있다. 가장 극적인 전환은 두 번째 남편의 죽음이다. 그 사건이 서래의 의도였는지 아닌지는 영화 내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직후 해준이 다시 그녀를 떠나게 되자, 서래는 그를 진심으로 잃었다는 슬픔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이해받지 못할 사랑을 선택하고, 마지막엔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바다로 사라진다. 서래는 말한다. “당신이 나를 찾지 못하는 게 내 방식의 사랑이에요.” 그 말은 곧 그녀의 결심이란, 해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없애는 것이었다는 뜻이다.
‘헤어질 결심’은 단순한 멜로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인간이 사랑을 통해 흔들리는 순간들, 확신하지 못하는 감정, 결심하지 못한 관계를 통해 깊은 여운을 남기는 여황이다. 해준과 서래는 서로에게 빠져들지만,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박찬욱 감독은 이 둘의 관계를 통해, 인간이 사랑 앞에서 얼마나 불완전하고, 또 얼마나 파괴적인 선택을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사랑해서 떠난다’는 문장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헤어짐을 결심하는 것은 이별이 아니라, 가장 큰 감정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해준의 침묵, 서래의 시선, 그들의 결말이 처음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의 잔해 속에서, 우리 또한 누군가와의 ‘헤어질 결심’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