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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가씨
    박찬욱 감독 영화 아가씨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는 사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 하여,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을 배경으로 한국적인 색채와 서양식 감각을 결합한 독창적인 서사를 선보인다. 주체적인 여성 서사, 계급과 성적 억압에 대한 통렬한 묘사, 예술적 영상미와 감각적인 편집이 어우러진 이 작품은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선 심리극, 사회비판극, 해방극으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계급과 욕망이 충돌하는 아가씨 히데코

    영화 ‘아가씨’는 단순한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그것은 여성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대상화되어 왔는지, 그리고 그러한 시선과 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결심과 해방을 시도하는지를 정밀하게 포착한 한 편의 해방 서사다. 영화는 일제강점기 조선을 배경으로 삼지만, 역사적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시대를 통해 비추는 인간 내면의 풍경이다. 주인공 히데코는 백작과 숙희의 속임수에 의해 이용당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누구보다 오래, 깊이 억눌려 있던 인물이다. 그녀가 자라온 공간은 ‘말하는 책을 읽는 여성’이라는 이상한 훈육의 공간이었다. 그녀는 여성의 목소리를, 특히 포르노그래픽한 남성 환상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각인받는다. 이 설정은 여성의 몸과 말이 어떻게 제도적으로 통제되어 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여기에서 영화는 비로소 ‘계급’과 ‘욕망’이라는 두 축을 본격적으로 충돌시킨다. 히데코는 귀족이지만 자유롭지 않으며, 숙희는 하층민이지만 행동이 자유롭다. 이 둘은 서로를 속이며 접근하지만, 거기서 싹트는 감정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히데코는 숙희를 통해 처음으로 인간적인 따뜻함과 감정을 경험하고, 숙희는 히데코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이 얼마나 좁았는지를 깨닫는다. 그들의 사랑은 속임수로 시작되었지만, 진심으로 발전하며, 결국은 세상의 틀을 벗어나고자 하는 공모가 된다. 이 모든 서사는 박찬욱 감독 특유의 감각적인 카메라 워크, 대칭적 구도, 촉각적인 음향 설계로 구현된다. 영화 ‘아가씨’의 서론은 그렇게, 인간 욕망과 억압의 틈에서 피어난 감정의 싹을 잔잔하면서도 선명하게 관객에게 제시한다.

    욕망의 시각화, 그리고 복수의 연대

    ‘아가씨’의 본론은 욕망을 ‘시각적 언어’로 번역하는 박찬욱 감독의 정교한 연출 미학으로 완성된다. 영화는 여성 간의 관계를 에로틱하게 묘사하면서도, 그것을 단순히 선정적인 장치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은 인물들이 욕망을 자각하고, 스스로의 주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특히 욕망의 전복은 백작 캐릭터를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남성적 권력을 상징하며, 히데코를 자신만의 소유물로 만들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영화 후반, 히데코와 숙희가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설계하며 백작을 역이용하는 순간, 영화는 복수극으로 전환된다. 박찬욱은 이 장면에서 도구로 쓰였던 여성의 몸과 말을 복수의 매개로 다시 배치한다. 히데코는 더 이상 누군가의 명령으로 낭독하지 않으며, 숙희는 더 이상 누구의 하녀도 아니다. 이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연대는 단순한 탈출이 아니라, 사회와 역사, 성적 억압에 대한 직접적인 반격이다. 특히 히데코가 백작의 눈을 바라보며 말하는 장면, “이제 당신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이유가 없어”는 영화 전체의 클라이맥스로, 남성 중심 세계에서 여성이 주체로 거듭나는 순간을 선언한다. 영화는 이러한 전복과 반격의 과정을 시종일관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전개한다. 각 장면은 정물화처럼 구성되어 있으며, 카메라는 끊임없이 여성을 응시하는 시선을 교란시킨다. 때로는 관음적이지만, 그것이 여성 스스로의 시선일 때는 전혀 다른 감정이 된다. 이 감정의 복잡성, 그리고 시각적 미학의 정교함은 ‘아가씨’를 단순한 로맨스나 서스펜스를 넘어서, 시선의 정치학을 품은 예술 영화로 탈바꿈시킨다.

    히데코와 숙희의 탈출 그 후

    결론에서 영화는 히데코와 숙희의 탈출로 끝나지만, 그 이후의 삶이 어떠할지는 말하지 않는다. 이 점이 바로 박찬욱 영화의 특징이자,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두 여인은 일본을 향해 떠나는 배 위에서 자유를 맞이하지만, 그 자유가 무엇인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는 영화가 대신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의도적인 비움이며, 그 비움은 오히려 더 큰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이 나눈 감정이 순수한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억압에 대한 반작용이었는지, 그 해답은 영화 속에 완전히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미완의 감정이야말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맞닿는다. 진짜 해방이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비롯된다. 히데코는 선택권이 없는 삶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했고, 숙희 역시 계획되지 않은 감정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길을 걸었다. 영화 ‘아가씨’는 이처럼 자유와 선택, 연대와 해방이라는 키워드를 예술적으로 펼쳐 보이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현실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욕망을 말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시대를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해당한다. 또한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단지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강조하는 것을 넘어, "진정한 관계란 무엇인가", "사랑은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까지도 포함시켰다. 그 모든 질문은 영화를 보는 관객 각자의 해석으로 이어질 것이며, ‘아가씨’는 그 열린 결말 속에서 더욱 깊이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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